오전의 베네치아, 공기는 축축하고 부드러웠다.
작은 운하를 따라 난 좁은 골목에 발을 들였을 때, 갓 빠져나온 밤의 서늘함이 아직 머물러 있었다. 묵직한 물비린내, 젖은 돌담에서 올라오는 이끼 낀 흙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수면은 거울처럼 고요했고, 오래된 건물들이 창백한 아침 햇살을 받아 희미하게 빛났다. 멀리서 들려오는 성당의 종소리가 물결을 타고 느리게 번져왔고, 이따금 노 젖는 소리가 정적을 가르고 지나갔다. 마치 세상의 모든 소음이 물 아래로 가라앉아버린 듯, 이 도시의 모든 움직임은 느리고 조심스러웠다.
발길 닿는 대로
지도를 접었다. 굳이 꺼내 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발길이 닿는 대로 그저 흘러가기로 했다. 좁은 골목들은 미로처럼 얽혀 있었고, 어느 방향으로 꺽어도 새로운 풍경이 열렸다. 벽에 바싹 붙어 옆으로 걸어야 겨우 빠져나올 수 있는 길도 있었고,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작은 다리들은 끊임없이 나를 오르내리게 했다.
다리 난간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면, 에메랄드빛 수면에 낡은 창문들이 일렁이며 비쳤다. 창문 안쪽으로는 오래된 가구의 그림자가 얼핏 스치거나, 화분에 심긴 제라늄이 무심히 햇살을 받고 있었다. 어디선가 커피 내리는 냄새가 바람에 실려왔다. 에스프레소의 쓴 향이 습한 공기와 뒤섞여 묘하게 따뜻했다.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길을 걷다가, 문득 인파의 왁자지껄함이 완전히 사라진 고요한 광장을 만났다. 낮은 건물들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이 피부에 닿았다. 낡은 나무 벤치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며 눈을 감았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멀리서 낮게 울리는 뱃고동, 그리고 아주 가까이에서 퍼드덕거리는 비둘기 날갯짓. 도시가 속삭이는 일상의 소리들이 머릿속 복잡한 생각들을 천천히 지워나갔다.

다리 위, 멈춘 시간
발길이 닿는 곳마다 시간의 흔적이 손끝에 잡힐 듯했다.
거칠게 닳은 벽돌의 질감, 빛바랜 프레스코화의 잔해, 수백 년 된 나무문의 갈라진 결. 손바닥으로 벽을 짚으면 차갑고 거친 감촉이 전해졌고, 그 안에 담긴 무수한 시간이 피부로 스며드는 듯했다. 길을 잃었다는 생각보다는, 도시의 심장부로 조금씩 더 깊이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뒤돌아 다시 걷는 것조차 하나의 유희가 되었다.
걷다 멈추고, 다시 걷고, 또다시 멈추는 리듬.
그 반복 속에서 나는 도시에 완전히 스며들고 있었다. 발아래 돌길의 울퉁불퉁한 감촉이 하루 종일 발바닥에 남았고, 공기 중에는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끝내 떠나지 않았다.
어느 날 오후, 작은 다리 위에서 멈췄 섰다.
다리 아래 운하에는 낡은 곤돌라 몇 척이 밧줄에 묶인 채 느릿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특별할 것 없는 풍경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모든 것이 멈췄다. 햇살이 운하 위로 금가루처럼 쏟아졌고, 물결 위로 건물들의 그림자가 길게 누웠다. 난간의 차가운 철 감촉을 손으로 느끼며 한참을 서 있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흐르는 물, 빛, 그림자. 그것만 바라보았다.
저 멀리서 한 할머니가 빨래 바구니를 들고 다리를 건너오고 있었다. 쭈글쭈글한 손으로 난간을 짚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어갔다. 그 뒷모습에서 오랜 시간 이 도시와 함께 늙어온 삶의 무게가 느껴졌다. 할머니가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도 나는 한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낯선 여행자가 아니라, 마치 나도 오래전부터 이곳에 살았던 사람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그 풍경의 일부가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길을 잃는다는 것
베네치아는 내게 효율이라는 잣대를 내려놓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빠르게 보고, 많이 경험하고, 모든 것을 정복하려는 욕심. 그것은 이곳에서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태도는 이 도시를 피곤하고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었다. 베네치아는 계획 없이 발길 닿는 대로 움직일 때, 비로소 자신의 진짜 얼굴을 보여주었다. 숨겼진 골목을 헤매고, 이유 없이 멈췄 서서 흘러가는 시간을 바라볼 때, 나는 비로소 복잡함 속에 숨어 있던 나만의 고요를 발견할 수 있었다.
길을 잃는 것이 두려움이 아니라 자유가 될 수 있다는 것. 모든 것을 알 필요 없이,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것.
인파 속에서도 나만의 속도로 걷고, 잠시 멈춰 서서 나만의 숨을 쉴 때, 도시의 번잡함은 놀랍도록 편안한 배경음악이 되었다. 베네치아는 내게 바깥의 소음보다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법을, 그리고 그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찾는 법을 가만히 일러주었다.
베네치아를 나만의 속도로 걷고 싶다면 → skyway.kr